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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문 대통령, 실정 인정하고 남은 임기 분열의 상처 치유해야" (한국일보 2021/01/08)

"문 대통령, 실정 인정하고 남은 임기 분열의 상처 치유해야" (한국일보 2021/01/08)


역대 정권이 다 그랬지만 문재인 정부의 롤러코스터는 특히 심한 편이다. 촛불의 열광은 3년 반 만에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고,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2021년은 사실상 정권 임기 마지막 해.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 정관계를 떠나 동북아질서와 한국의 미래를 연구하는 싱크탱크 '니어재단'을 이끌고 있는 정덕구 이사장으로부터 현 정부의 문제와 남은 과제에 대해 얘기를 들어 봤다.


-2020년 우리 모두가 거친 자갈밭을 지나간 느낌이다. 2021년의 역사적 의미를 총평한다면.

“2020년이 단절의 시간이었다면 2021년은 복원의 시간이어야 한다. 코로나를 종식시켜 일상을 복원하면서 포스트코로나 체제를 준비해야 한다. 시선을 국내 정치보다 세계로 돌리고 미래를 경작해야 한다. 두 나라처럼 되어 버린 사회 분열도 복원해야 한다. 양극단에서 벗어나 협치와 중도정치로 전환할 때이다.”


쏠림과 질주의 3년 반...87년 체제 한계 증명

-뜨거운 지지 속에 출범했던 문재인 정부가 3년 반이 지난 지금 극심한 민심이반에 직면해 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좀 거칠게 표현하면 지난 3년 반은 쏠림과 질주의 시간이었다.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가 스스로를 과신하며 국정을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마치 작전하고 게임하듯 국정을 휘몰아 갔다. 국민들은 점점 실용을 원하는데, 정권은 원리주의적, 민족주의적 이념편향으로 질주했다. 대통령이 균형자, 속도조절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노조, 시민단체, 586그룹, 급진좌파 등 정권 파트너들에게 끌려다닌 것 아닐까 싶다. 그러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촛불 동력이 떨어질 즈음 코로나가 터졌고 총선이 실시됐는데 뜻밖에 압승을 했다. 결과적으론 이게 독이었다고 본다.”

-총선 압승이 독이 됐다는 의미는.

“어느 정권이든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 강경파가 이끌다가 국정이 어려워지면 온건파가 나서 정리를 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총선에서 압승을 하니까 온건파가 나설 기회가 사라지고 다시 강경파가 득세했다. 지난 3년 반의 문제점을 리뷰하고 반성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원래 내리막길에선 속도를 줄여야 하는 법 아닌가. 그런데 정권 내리막길에 오히려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마치 사바나에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휘몰고 가듯 한다. 국정 우선순위가 잘못 설정됐다고 본다. 총선 압승으로 코로나 극복과 개혁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코로나 극복에 총력전을 펴려면 국민적 대동단결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개혁드라이브를 좀 멈췄어야 했다. 다 잡겠다고 질주하다가 결국 둘 다 놓치게 됐다. 다시 말하지만 온건파가 3년 반을 정리하면서 정권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크게 보면 87년 헌정체제가 수명을 다하고 있음이 현 정부를 통해 증명됐다고 본다.”


가난한 사람 더 가난해져...통렬히 반성해야

-결국 가장 힘든 건 서민 빈곤층이다.

“진보 정부가 가장 중시하는 계층이 사회적 약자, 중산층 및 저소득층 아닌가. 그런데 이들의 삶이 더 악화됐다. 소득주도성장론, 증세론, 반시장·반기업정책 등 현 정부의 정책기조가 경제 생태계를 침하시켰기 때문이다. 생태계가 무너지면 부자들은 별문제가 없고 약자들만 희생하게 된다. 현 정부는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의 삶이 되레 나빠진 현실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불평등은 구조적인 것이고 과거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고 현 정부는 생각하는 듯하다.

“외환위기 이후부터 분배가 악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맞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경제가 더 축소불균형으로 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가장 뼈아픈 건 가계의 위축이다. 고용이 부진하니까 수입은 감소하고, 주거비를 중심으로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 부채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정책실패의 파장을 재정으로 메우려다 오히려 빈곤층이 55만명이나 증가했다. 올해 가계부채와 개인파산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경제가 어려워지면 시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재벌개혁을 하면서도) 30대 그룹 총수들과 만나 협조를 구했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시장세력으로부터 협조도 못 받을 뿐 아니라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하다.”

-가장 실패한 정책이 부동산이다. 지지율 추락의 핵심원인이기도 한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주택을 이념적으로 접근한 게 문제였다. 주택을 공공재로 보면서 사적 자치 영역이었던 주거 생태계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특히 집을 몇 채씩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패널티성 세금을 물린다 해도, 그냥 집 한채 갖고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집값이 올랐다고 중과세하는 건 아주 잘못된 것이다. 고도의 사적 자치영역인 주택임대차제도에 재갈을 물린 것도 큰 실책이다.”



-탈원전 문제도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 같다.

“국가에너지 구성비율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국가필수품인 에너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원자력을 괴물로 취급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다 보니 계획했던 원전건설을 중단하고, 가동중인 원전까지 멈추는 실책을 범하게 된 것이다. 신재생에너지 생산성이 아직 낮은데 에너지 조달비용은 어떻게 할 것이며, 원전건설 중단에 따른 매몰비용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 정부에서 엄청난 소송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잘못된 신념이 국가 백년대계를 수렁에 빠지게 한 것이다.“


민족주의 탈피한 정통외교 복원해야

-나라 밖 상황도 녹록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 한 쪽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대외팽창으로 인해 자유체제가 공산체제에 유린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에 맞서는 민주주의 가치동맹을 구축하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가치동맹에 함께 서야 한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많은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지만, 미국과는 가치를 공유하는 관계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이건 정체성의 문제다. 민주주의, 시장체제, 인권보호라는 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지나친 민족주의적 견해를 외교안보 영역에 반영해서는 안 된다. 머지않아 한미 정상회담도 열릴 텐데, 바이든 행정부가 한국의 가치와 이념에 관한 의구심과 갈등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에 문 대통령이 중국에 대해 운명공동체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발언은 곤란하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중국과 관계가 몹시 불편해질텐데.

“일각에선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호주 얘기를 종종 하는데, 우리는 호주와 다르다. 우리나라는 제조업국가로서 글로벌 밸류체인 등에서 중국과 경제관계가 훨씬 복잡하고 밀접하다. 자원국가인 호주처럼 중국과 대립할 수는 없다. 다만 두 가지 거리는 꼭 유지해야 한다. 하나는 가치의 거리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중국의 공산주의, 이 거리를 좁힐 방법은 없다. 두 번째는 기술의 거리, 즉 핵심기술의 우위다. 만약 이 기술격차가 뒤집어지면 우리는 중국에 완전히 잡히고 만다. 향후 미국은 중국의 추격을 막기 위해 포스트코로나 신기술체계를 가속화할 텐데, 우리나라는 대중 기술격차 우위 유지를 위해 미국과 신기술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가치와 기술, 두 가지 거리는 확고히 유지하면서 나머지는 최대한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진정한 외교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한일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이 안보이는 상황이 길어지고 있다.

“가장 이상적 방법은 일본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정부 차원에선 과거사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사과를 어정쩡하게 하면서 자꾸 불가역만 고집하니까 우리 국민들이 납득을 못하는 거다. 일본은 확실히 갇힌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쨌든 한미일은 가치동맹의 일원이다. 한일관계 불편하면 중국에 대항할 수 없고 대북문제도 힘들어진다. 결국 정통 외교의 복원이 필요하다. 바이든행정부도 외교의 복원을 얘기하지 않았나. 한일관계뿐 아니라 외교 전반에서 이념과 민족주의, 비전문가, 그리고 중국 및 북한에 경도됐던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도화하지 않으면 보수야권 희망없어

-현 정부에 대한 실망이 크지만 그렇다고 현 보수야권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보수야권은 무엇이 문제라고 보는가.

“이명박 박근혜정부의 실패였다. 중도로 갔어야 했는데 이념적 경직성과 기존 이익집단 보호막 역할만 하면서 오히려 복고로 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다수 국민을 자생적인 진보세력으로 만들어 놓았다. 김대중정부가 시작한 생산적 복지, 사회안전망 강화 같은 노력을 확장했어야 했다. 세계적으로도 시장만능에 대한 반성이 확산되고 있지 않는가. 양극화나 저출산 같은 현실적 문제에 대응하려면 이념체계를 중도화하고 진보인사도 과감히 영입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변혁을 하지 못하면 보수는 희망이 없다.”


-문재인 정부가 남은 1년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문 대통령은 그동안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새해를 출발해야 한다. 통합, 화해, 협치로 분열을 극복하고 이를 통해 코로나도 종식시켜야 한다. 4분기부터는 일상을 회복하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런 다음 포스트코로나의 대전환에 대비해야 한다. 정치는 싸우더라도, 과학기술이나 첨단산업은 밤을 새우면서 준비해야 하고 혁신의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지난 3년 반 발목을 잡았던 네 가지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실용과 동떨어진 이념의 함정, 둘째 촛불승리 및 총선압승으로 만들어진 과신과 오만의 함정, 셋째 착시를 낳는 팬덤의 함정, 마지막으로 외교적 민족주의의 함정. 이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면 희망은 없다. 모쪼록 문 대통령이 그간의 실패를 인정하고 남은 임기 동안 정신 바짝 차려 국정운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정과 견제, 균형을 회복시켜 주셨으면 한다.”


◆정덕구 이사장은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IMF교섭과 외채협상 등을 주도했다. 산업자원부 장관 때는 부품소재, 중간재 등 산업구조개편에 힘썼고 17대 의원을 지냈다. 2007년 독립싱크탱크인 니어재단을 설립, 한반도 미래전략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외환위기 징비록’ ‘한국을 보는 중국의 본심’ ‘기로에 선 북중관계’ 등이 있다.

이성철 콘텐츠본부장 sclee@hankookilbo.com
정리=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