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제조업 중심 하드파워 경제 선회…'디지털 DNA'로 대응해야" (한국경제 2021/8/23)
한경 인터뷰 -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한국 외교, 北에 집중하다 보니 中 의존 커져
막연한 공포와 환상에 빠져 新사대주의 심화
만난 사람=강동균 국제부장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23일 서울 역삼동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중국은 예전과 매우 다른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며 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자강 외교’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문찬 기자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73)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데도 국제정치 관련 학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3년 중국 베이징대에서 초빙교수로 강의를 시작한 이후부터 18년간 중국 경제계 고위 인사들과 깊이 교류하며 중국 외교의 변화상을 목격했다.
23일 서울 역삼동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중국이 한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려면 막연히 갖고 있는 포비아(공포)와 환상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이사장은 24일 한·중 수교 29주년에 맞춰 수년에 걸쳐 완성한 저서 《극중지계 1, 2》(사진)를 출간했다. 한국이 거대 중국에 예속되지 않고 공존하기 위한 여덟 가지 생존 방정식이 담겼다.
▷한·중 수교 29주년에 맞춰 책을 출간했습니다.
“중국은 29년 만에 매우 위협적인 국가가 됐습니다. 한·중 수교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중국은 당시 한국의 경제 개발과 위기 극복, 제조업 발전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한·미 동맹도 전략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대신 한·중은 상호보완적인 산업구조를 통해 보완적 생존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한·중 사이 국력의 비대칭성이 확대됐다는 겁니다. 보완적 관계가 무너지면서 한·중의 ‘관계 방정식’이 기울어진 것이죠. 시진핑 시대에 접어들어 중국은 중화민족주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과학기술 중국몽 등을 내세우며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의 ‘전략적 모호성’을 강조하는데요.
“중국은 한국에 미·중 사이에서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중 사이의 ‘낀 존재’는 한국이 맞닥뜨린 새로운 생존 환경입니다. 앞으로 한·중 관계는 충돌 예속 공존의 세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가 될 겁니다. 한국은 중국과의 충돌을 방지하고 예속을 피하는 기본 조건을 설정해야 합니다. 미국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익이 맞을 때만 한국을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국은 위협적이고, 미국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자강 외교’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공존의 생존 방정식을 세워야 할 때죠.”
▷정부가 중국에 유독 저자세 외교를 보인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원숭이를 혼내주기 위해 원숭이 앞에서 닭의 모가지를 친다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2017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사태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중국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데, 한국은 오랜 세월 특정 국가에 편승하는 외교를 해 작전과 게임 능력이 약합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이 다른 나라를 겁주기 위해 시험적으로 야단치는 나라가 된 것이죠. 시진핑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임기 동안 중국 국가주석을 이토록 만나지 못한 건 유례가 없습니다. 한국을 견인하기 위해 애타게 하는 겁니다.”
▷한국이 중국의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뜻입니까.
“한국 사회에는 대(對)중국 포비아가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점을 역이용합니다. 한국 외교는 북한에 경사돼 있습니다. 외교 역량이 한반도에 집중되다 보니 중국 의존도가 심해지는 악순환을 겪는 거죠. 우리 사회에는 북핵 문제 등 남북 관계에 중국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환상, 남북통일에 중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란 환상, 중국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환상 등 중국에 대한 3대 환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중국에 길들여진 외교 자세까지 더해지다 보니 우리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중국이 미화되는 신(新)사대의식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환상을 언젠가는 잘라내야 합니다.”
▷환상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 단절까지 의미합니까.
“한국은 중국과 적국이 돼서는 안 됩니다. 독자생존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충돌을 방지하려면 우리 국익과 직결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중국은 2013년 서해상의 동경 124도선을 한·중 경계선으로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우리 군에 이 선의 서쪽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통보했습니다. 동경 124도선을 경계선으로 하면 서해의 70% 이상이 중국 관할이 됩니다. 그런데도 정작 중국 선박들은 124도선을 넘어 백령도 앞바다를 다니고 전투기들은 방공식별구역(ADIZ)을 넘나듭니다. 중국이 우리의 주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인데 우리 정부는 강력한 항의도 못 합니다. 우리 주권이 위협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레드라인을 설정해야 합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협의체)를 핵심 대중(對中) 견제 노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한국이 쿼드에 스스로 가입해야 할 때가 올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쿼드는 느슨한 형태의 가치동맹 성격이 강합니다. 회원국 간 입장차가 커 단시간 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술동맹으로 갈 가능성은 큽니다. 한국은 중국의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할 때까지는 옵서버로서 과학기술 분야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식으로 수위를 조절해야 합니다. 다자체제로의 귀속은 특정국에 예속되지 않는 최상의 선택이 될 수 있죠. 다만 이 과정에서 중국과의 외교 소통은 강화해야 합니다. 중국이 민감해하는 문제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최근 논란이 된 대만해협 문제도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이상의 표현으로 확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한미군의 유사시 활동 범위에 대만이 포함돼서는 안 됩니다.”
▷중국 당국이 빅테크에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데요.
“중국은 소프트파워를 포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체제 변화가 있었습니다. 중국은 그동안 많은 창업자의 성공이 중국 체제의 우수성과 특성에 힘입었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이들이 글로벌 플레이어가 돼 미국 증시에 상장하거나 미국 빅테크들과 경쟁하길 원했죠. 그런데 중국은 마윈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제 시진핑에 대한 절대 충성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프트파워가 아니라 하드파워인 제조업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이는 중국 내에서 신흥 창업 기업들의 생존 방정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궁극적으로 시진핑이 주창하는 과학기술 중국몽의 범위도 촉소될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이나 경제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봅니까.
“미국은 중국 중심의 글로벌 밸류체인(GVC)을 해체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중국 당국의 빅테크 탄압과 맞물려 빈 곳을 미국 빅테크가 치고 들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 기업도 그중 일부를 파고들 수 있을 겁니다. 한국 빅테크가 중국 내수시장에 진입하긴 어렵겠지만 글로벌 기업화하던 중국의 많은 소프트 분야 기업이 위축되면서 반사효과를 누릴 순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과 GVC 재편 과정에 충분히 적응해야 합니다.”
▷제조업을 강화하는 중국에 맞설 만한 한국의 전략자산은 뭐라고 봅니까.
“한국은 특유의 ‘디지털형 DNA’가 있습니다. 중국이 과학기술 중국몽을 추구하고 있지만 한국의 DNA를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국은 이미 가진 디지털 마인드를 디지털 생태계로 육성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략적 차원에서 중국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원천 물자가 무엇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친환경 조선 기술과 차세대 자동차, 시스템 반도체, 수소에너지, 데이터 플랫폼 분야가 향후 중국에 맞설 만한 한국의 전략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이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고 봅니다. 국론 분열이 심각하고 정치가 이념화되고 있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자유로운 선택의 공간이 넓습니다. 한·미 동맹이라는 기본 전제가 탄탄하고 민주주의 10개국(D10)으로서의 국력과 국격이 있다는 게 대표적입니다. 국민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는 국가 리더십이 이를 잡아줘야 합니다. 주권과 생존권,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는 자강 외교가 필요합니다.”
■ 정덕구 이사장은
외환위기 때 IMF협상 주도 니어재단 설립해 중국 연구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1998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차관을 거쳐 1999년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지낸 ‘경제통’이다. 1971년 행정고시로 공직에 발을 들인 이후 경제 관련 부처에서 줄곧 승승장구했다. 특히 1997년 11월 외환위기 발생 직후 재경원 제2차관보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실무협상을 주도하며 ‘외환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정 이사장은 2003년 중국 베이징대 초빙교수로 재직한 이후 ‘중국통’으로 거듭났다. 원자바오 전 총리 등 중국 정·재계 고위직과 깊은 유대를 쌓으며 중국을 바라보는 눈을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4~2007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정 이사장이 2007년 세운 니어재단은 중국과 동북아시아 정세를 연구하는 순수 민간 싱크탱크다. 그는 한국에는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깊이있는 중국 연구가 부족하다는 판단에 니어재단 설립을 주도했다.
정 이사장은 24일 출간한 《극중지계》에 앞서 동북아 정세에 관한 다섯 권의 책을 펴냈다. 저서로는 2004년 《거대 중국과의 대화》, 2011년 《한국을 보는 중국의 본심》, 2013년 《기로에 선 북중관계》 《한일관계, 이렇게 풀어라》, 2017년 《동북아시아의 파워 매트릭스》 등이 있다.
만난 사람=강동균 국제부장/정리=송영찬 기자 kdg@hankyung.com
"中, 제조업 중심 하드파워 경제 선회…'디지털 DNA'로 대응해야" (한국경제 2021/8/23)
한경 인터뷰 -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한국 외교, 北에 집중하다 보니 中 의존 커져
막연한 공포와 환상에 빠져 新사대주의 심화
만난 사람=강동균 국제부장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23일 서울 역삼동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중국은 예전과 매우 다른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며 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자강 외교’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문찬 기자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73)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데도 국제정치 관련 학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3년 중국 베이징대에서 초빙교수로 강의를 시작한 이후부터 18년간 중국 경제계 고위 인사들과 깊이 교류하며 중국 외교의 변화상을 목격했다.
23일 서울 역삼동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중국이 한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려면 막연히 갖고 있는 포비아(공포)와 환상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이사장은 24일 한·중 수교 29주년에 맞춰 수년에 걸쳐 완성한 저서 《극중지계 1, 2》(사진)를 출간했다. 한국이 거대 중국에 예속되지 않고 공존하기 위한 여덟 가지 생존 방정식이 담겼다.
▷한·중 수교 29주년에 맞춰 책을 출간했습니다.
“중국은 29년 만에 매우 위협적인 국가가 됐습니다. 한·중 수교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중국은 당시 한국의 경제 개발과 위기 극복, 제조업 발전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한·미 동맹도 전략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대신 한·중은 상호보완적인 산업구조를 통해 보완적 생존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한·중 사이 국력의 비대칭성이 확대됐다는 겁니다. 보완적 관계가 무너지면서 한·중의 ‘관계 방정식’이 기울어진 것이죠. 시진핑 시대에 접어들어 중국은 중화민족주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과학기술 중국몽 등을 내세우며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의 ‘전략적 모호성’을 강조하는데요.
“중국은 한국에 미·중 사이에서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중 사이의 ‘낀 존재’는 한국이 맞닥뜨린 새로운 생존 환경입니다. 앞으로 한·중 관계는 충돌 예속 공존의 세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가 될 겁니다. 한국은 중국과의 충돌을 방지하고 예속을 피하는 기본 조건을 설정해야 합니다. 미국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익이 맞을 때만 한국을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국은 위협적이고, 미국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자강 외교’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공존의 생존 방정식을 세워야 할 때죠.”
▷정부가 중국에 유독 저자세 외교를 보인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원숭이를 혼내주기 위해 원숭이 앞에서 닭의 모가지를 친다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2017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사태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중국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데, 한국은 오랜 세월 특정 국가에 편승하는 외교를 해 작전과 게임 능력이 약합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이 다른 나라를 겁주기 위해 시험적으로 야단치는 나라가 된 것이죠. 시진핑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임기 동안 중국 국가주석을 이토록 만나지 못한 건 유례가 없습니다. 한국을 견인하기 위해 애타게 하는 겁니다.”
▷한국이 중국의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뜻입니까.
“한국 사회에는 대(對)중국 포비아가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점을 역이용합니다. 한국 외교는 북한에 경사돼 있습니다. 외교 역량이 한반도에 집중되다 보니 중국 의존도가 심해지는 악순환을 겪는 거죠. 우리 사회에는 북핵 문제 등 남북 관계에 중국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환상, 남북통일에 중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란 환상, 중국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환상 등 중국에 대한 3대 환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중국에 길들여진 외교 자세까지 더해지다 보니 우리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중국이 미화되는 신(新)사대의식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환상을 언젠가는 잘라내야 합니다.”
▷환상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 단절까지 의미합니까.
“한국은 중국과 적국이 돼서는 안 됩니다. 독자생존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충돌을 방지하려면 우리 국익과 직결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중국은 2013년 서해상의 동경 124도선을 한·중 경계선으로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우리 군에 이 선의 서쪽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통보했습니다. 동경 124도선을 경계선으로 하면 서해의 70% 이상이 중국 관할이 됩니다. 그런데도 정작 중국 선박들은 124도선을 넘어 백령도 앞바다를 다니고 전투기들은 방공식별구역(ADIZ)을 넘나듭니다. 중국이 우리의 주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인데 우리 정부는 강력한 항의도 못 합니다. 우리 주권이 위협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레드라인을 설정해야 합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협의체)를 핵심 대중(對中) 견제 노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한국이 쿼드에 스스로 가입해야 할 때가 올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쿼드는 느슨한 형태의 가치동맹 성격이 강합니다. 회원국 간 입장차가 커 단시간 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술동맹으로 갈 가능성은 큽니다. 한국은 중국의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할 때까지는 옵서버로서 과학기술 분야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식으로 수위를 조절해야 합니다. 다자체제로의 귀속은 특정국에 예속되지 않는 최상의 선택이 될 수 있죠. 다만 이 과정에서 중국과의 외교 소통은 강화해야 합니다. 중국이 민감해하는 문제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최근 논란이 된 대만해협 문제도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이상의 표현으로 확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한미군의 유사시 활동 범위에 대만이 포함돼서는 안 됩니다.”
▷중국 당국이 빅테크에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데요.
“중국은 소프트파워를 포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체제 변화가 있었습니다. 중국은 그동안 많은 창업자의 성공이 중국 체제의 우수성과 특성에 힘입었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이들이 글로벌 플레이어가 돼 미국 증시에 상장하거나 미국 빅테크들과 경쟁하길 원했죠. 그런데 중국은 마윈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제 시진핑에 대한 절대 충성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프트파워가 아니라 하드파워인 제조업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이는 중국 내에서 신흥 창업 기업들의 생존 방정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궁극적으로 시진핑이 주창하는 과학기술 중국몽의 범위도 촉소될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이나 경제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봅니까.
“미국은 중국 중심의 글로벌 밸류체인(GVC)을 해체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중국 당국의 빅테크 탄압과 맞물려 빈 곳을 미국 빅테크가 치고 들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 기업도 그중 일부를 파고들 수 있을 겁니다. 한국 빅테크가 중국 내수시장에 진입하긴 어렵겠지만 글로벌 기업화하던 중국의 많은 소프트 분야 기업이 위축되면서 반사효과를 누릴 순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과 GVC 재편 과정에 충분히 적응해야 합니다.”
▷제조업을 강화하는 중국에 맞설 만한 한국의 전략자산은 뭐라고 봅니까.
“한국은 특유의 ‘디지털형 DNA’가 있습니다. 중국이 과학기술 중국몽을 추구하고 있지만 한국의 DNA를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국은 이미 가진 디지털 마인드를 디지털 생태계로 육성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략적 차원에서 중국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원천 물자가 무엇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친환경 조선 기술과 차세대 자동차, 시스템 반도체, 수소에너지, 데이터 플랫폼 분야가 향후 중국에 맞설 만한 한국의 전략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이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고 봅니다. 국론 분열이 심각하고 정치가 이념화되고 있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자유로운 선택의 공간이 넓습니다. 한·미 동맹이라는 기본 전제가 탄탄하고 민주주의 10개국(D10)으로서의 국력과 국격이 있다는 게 대표적입니다. 국민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는 국가 리더십이 이를 잡아줘야 합니다. 주권과 생존권,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는 자강 외교가 필요합니다.”
■ 정덕구 이사장은
외환위기 때 IMF협상 주도 니어재단 설립해 중국 연구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1998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차관을 거쳐 1999년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지낸 ‘경제통’이다. 1971년 행정고시로 공직에 발을 들인 이후 경제 관련 부처에서 줄곧 승승장구했다. 특히 1997년 11월 외환위기 발생 직후 재경원 제2차관보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실무협상을 주도하며 ‘외환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정 이사장은 2003년 중국 베이징대 초빙교수로 재직한 이후 ‘중국통’으로 거듭났다. 원자바오 전 총리 등 중국 정·재계 고위직과 깊은 유대를 쌓으며 중국을 바라보는 눈을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4~2007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정 이사장이 2007년 세운 니어재단은 중국과 동북아시아 정세를 연구하는 순수 민간 싱크탱크다. 그는 한국에는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깊이있는 중국 연구가 부족하다는 판단에 니어재단 설립을 주도했다.
정 이사장은 24일 출간한 《극중지계》에 앞서 동북아 정세에 관한 다섯 권의 책을 펴냈다. 저서로는 2004년 《거대 중국과의 대화》, 2011년 《한국을 보는 중국의 본심》, 2013년 《기로에 선 북중관계》 《한일관계, 이렇게 풀어라》, 2017년 《동북아시아의 파워 매트릭스》 등이 있다.
만난 사람=강동균 국제부장/정리=송영찬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