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AR Policy Brief Series 는 국제 사회 내에서 수 없이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정책 이슈를 다룹니다. 핵심 정책 현안을 선정하여 그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분석과 정책 제언을 듣고자합니다.격류를 타고 가는 시대 흐름을 올바로 적시에 파악하는데 다소마나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발행 일시 : 2023년 7월
발행 기관 : NEAR 재단
집필 제목 : 우크라이나 전쟁 500일의 전황과 전망 그리고 한반도
집필 정보 : 신범식(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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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500일의 전황과 전망 그리고 한반도
신범식(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난 7월 8일로 500일을 넘겼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세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가 주로 공세의 입장이었다면, 지난 6월 초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러시아가 수세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공수가 뒤바뀌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지난 7월 초순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NATO) 정상회담에서 나토 가입을 확약받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대반격’을 이어가며 실지 회복을 위한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1.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개와 현황
지난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러시아는 동부 돈바스, 남부 크림, 그리고 북부 벨라루시 방면에서 전면적 공격을 개시하였다가 키예프 함락을 포기하였고, 이후 러시아군은 돈바스 지역에 집중하면서 이 지역과 크림반도를 연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난공불락의 도시 요새라 불렸던 마리우풀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러시아 본토로부터 점령지를 통한 크림반도 연결을 달성했다. 이후 전황은 길고 지리한 소모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늦은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우크라이나가 루간스크 방면의 일부 점령지를 탈환하자 러시아는 10월 말 ‘부분 동원령’을 통해 징집병 30만을 포함해 총 45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충하면서 우크라이나의 공세에 대응하는 한편, 동부 점령 4개주에 대한 영토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돈바스 지역의 주요 거점인 바흐무트 전투를 통해 우크라이나군 병력을 소진시키는 소모전을 지속하였다. 개전 초 이후 지지부진하던 종전 중재 노력이 지난 2월 전쟁 1주년이 지나면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영토 탈환을 위해 더 큰 공격력을 확보하기 위해 서방측에 대대적 무기지원을 요청하였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은 완편 기갑부대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미국의 에이브람스 계열 전차와 독일의 레오파드-II 전차 그리고 장갑차를 비롯한 각종 전술차량 및 야포들을 다량 지원하였다. 결정적인 공군력 열세의 보강을 위해 필요한 F-16을 비롯해 중장거리 미사일 등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지원 요청에 대해 서방측은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향후 전황에 따라서는 이에 대한 지원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5월에 길고 소모적인 전투로 기억되는 바흐무트 전투를 끝으로 러시아의 공세는 마무리되었고, 이 소모전 시기를 활용해 러시아는 새롭게 형성된 긴 전선에 걸쳐 3중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한편 지난 6월 초 카홉스카야 댐의 폭발 사고가 있었는데, 이로써 드네프르 강 하류에 홍수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양측은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댐의 붕괴는 새로는 전투의 서막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댐의 붕괴로 헤르손 지역에서의 군사 작전이 어려워진 상황은 러시아가 오데사 방면으로 확전할 가능성을 줄여주는 한편,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헤르손 방면에서 진행되기도 어렵게 만듦으로써 새롭게 시작되는 우크라이나의 반격과 러시아의 수비는 자포리자와 도네츠크 지역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6월 4일 이후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의 1차 공세는 예상대로 자포리자와 도네츠크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후 한 달여간 계속된 우크라이나의 공세는 큰 성과가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탐색전과도 같은 1차 공세 이후에도 그동안 절치부심 “대반격”을 준비했던 우크라이나는 7월말 2차 공세를 시작하면서 러시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치열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한편 최근 러시아의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일으킨 무장 반란은 러시아 군부 내지 최고지도자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며 러시아 전쟁 수행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서방 및 우크라이나 측의 큰 기대를 모으며 세계가 예의 주시하였지만, 바그너그룹이 돈강로스토프(Rostov on Don)에 위치한 러시아 남부사령부를 장악한 뒤 모스크바로 진격했던 이 사태는 36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후 바그너그룹의 역할조정과 벨라루시에서의 새로운 활동 등이 확인되면서 프리고진을 둘러싼 많은 추측과 그 여파에 대한 논란은 점차 잦아들었다. 이 사건 직후 미국의 전쟁연구소(ISW))가 전망한 바와 같이 이 사태의 전쟁에 대한 직접적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이 노출한 러시아 군 지도부의 취약성과 푸틴 리더십에 대한 부정적 영향에 대한 관찰은 지속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망
전쟁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일단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가 관건이다. 전쟁은 전장(戰場)에서 수행되지만, 전쟁의 마무리는 협상테이블에서 이루어진다. 종전을 위한 협상 조건은 전장에서의 성과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첫째 시나리오는 종전을 위한 협상 단계로의 전환 가능성과 관련된다. 우크라이나가 향후 서너 차례의 공세를 통해 러시아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한다면, 서방 입장에서 이 전쟁을 더 길게 끌고 가기에는 한계점에 봉착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 쌓여온 전쟁 피로감에 더해 전쟁 지원을 지속하며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유럽 국가들 내부의 불만과 이견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내년 봄에, 미국도 내년 11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한다. 전쟁을 더 끌고 가는 것이 선거에 미칠 영향이 불확실하므로, 정치가들에게는 전쟁의 영향을 관리해 그 예측가능성이라도 높이려는 최소한의 시도라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 5월 19일부터 열렸던 히로시마 G7 정상회담에서 감지되었다. 서방 선진국들은 이 전쟁의 마무리와 관련하여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으나 대신 유럽연합(EU)에는 가입하면서 전후 대규모 재건사업을 제공받는 방식의 종전 협상을 추진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방의 추진 의지에 따라서는 우크라이나가 이 타협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의 의지는 여전히 높지만, 서방의 지원이 줄어들면 우크라이나가 전면전을 단독으로 지속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전쟁 지속의 의지가 전쟁 지속의 조건이 되는 현 상황에서 서방의 우크라이나전에 대한 입장 변화가 종전의 핵심적 조건이 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상황이 만만치 않다. 1년 반 가까운 전쟁을 수행하면서 러시아는 서방측의 대대적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지만, 러시아 경제가 얼마나 더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지난 5월 17일 러시아 통계청(Rosstat)은 2023년도 1/4분기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이 –1.9%로 발표했다. 2023년도 1/4분기 러시아의 석유 수출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최대 수준이었지만, 석유 수출을 통한 러시아의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43% 감소했다. 예상보다 제재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주장도 있으며, 수출보다 내수가 늘어나면서 그 충격을 상쇄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문제는 재정 적자이다. 전년 동기 대비 2023년 1~4월 러시아 연방정부의 수입은 22% 감소한 7조 8,000억 루블(한화 약 135조 3,980억 원)을 기록했으며, 지출은 26% 늘어난 11조 2,000억 루블(한화 약 194조 4,170억 원)을 기록했다(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보고서, 2023년 4월). 특히 차년도 예산을 끌어와 지출하는 방식의 회계가 얼마나 더 가능할지 불확실하다. 러시아의 자원의 판로가 다변화되면서 대러시아 경제 제재의 효과가 반감된 것은 분명하지만, 러시아 경제적 취약성은 여전히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의 약점으로 주목된다.
우크라이나의 소위 “대반격”이 시작된 이후 전쟁과 관련된 푸틴 대통령의 일련의 인터뷰나 연설에서 서방의 지원에 힘입은 우크라이나의 반격은 무위로 끝나고 있으며 서방의 무기고는 곧 고갈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일부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확전보다는 종전에 대한 선호가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러시아로서도 전쟁 점령지를 영토화하고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막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차선의 선택지일 수 있다.
물론 점령지로부터의 퇴각이라는 선택지는 러시아 지도부의 염두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전쟁을 지속하거나 확전을 기획하기에는 러시아가 아슬아슬하게 유지해 가고 있는 국내 정치적 및 경제적 균형이 상당히 취약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영토 탈환의 견지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서방과 러시아가 암묵적으로 종전을 위한 구도를 우크라이나에게 요구하게 될 것이다. 서방은 우크라이나에게 EU 가입과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대대적 원조를 제안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빠르면 이번 가을부터 연말 사이에 이 협상 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서방의 종전을 향한 압력에 반대하며 우크라이나가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하는 저강도의 대러시아 저항 전쟁을 장기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둘째 시나리오는 확전과 불안정성의 확대·지속 시나리오다. 이번 여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서너 차례에 걸친 우크라이나의 공세가 큰 전과를 거두면서 우크라이나가 현 러시아 점령지 내에 상당한 반격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 우크라이나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공격형 무기를 서방측에 요청할 것이다. 서방측은 자유주의 진영 연대(連帶)의 관점에서라도 이런 우크라이나의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전쟁의 지속을 넘어 확전의 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러시아가 부분적으로 퇴각하게 될 경우 러시아가 다시 타협적 입장에서 종전을 모색할 것인지(이는 러시아의 명백한 패전으로 인식될 것이다!) 아니면 추가로 동원령을 내리고 오데사와 하리코프 등지에 대한 공세를 통해 영토의 추가적 획득을 시도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
추가 동원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러시아가 과연 얼마나 여력이 있을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한 점은 추가적 동원을 단행하게 되면 그것은 푸틴 정권이 명운을 걸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지도부는 확전에 따른 부담을 상쇄하기 위해 핵을 포함한 전략무기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유혹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최근 메드베데프 전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의한 크림 탈환 시도나 자포로제 차단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전략무기 사용 가능성을 거론한 것은 바로 이런 러시아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시나리오 중 어떤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의 공세가 영토 회복이라는 가시적인 결실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서방에서는 사정거리가 단축·조정된 스톰쉐도우(Storm Shadow)의 공급을 필두로 향후 타우러스(TAURUS)나 어태큼스(ATACMS)와 같은 중장거리 미사일 및 F-16 전투기의 공급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서방은 타협적 구도보다 우크라이나의 지원을 통해 러시아를 더 약화시키는 전략을 유지하는 방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반격은 이번 전쟁의 향방을 가를 중대한 국면이 될 것이다. 세계 주요국들은 한편으로는 전쟁의 종전을 위한 중재의 가능성과 모멘텀은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의 반격 성과에 따른 전쟁 지속의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유동적 구도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3. 우크라이나 전쟁과 한반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을 살펴보는데 가장 주목할 지점은 역시 러-북관계의 밀착과 한-미-일 공조체제의 강화라고 할 것이다. 지난 7월말 러시아의 쇼이구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전승절 기념해사 참석차 방문한 것은 러시아와 북한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내외의 우려를 낳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줄곧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 패권의 오만이 전쟁의 배경이 깔려 있으며 전쟁의 원인을 일방적 나토(NATO)의 확장에서 러시아가 느낀 위협이라 논평하였다. 북한은 유엔(UN)의 러시아 전쟁 규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5개국 중 하나였으며,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러시아를 축출하는 결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던졌다. 이런 북한의 대응에 호응이라도 하듯 러시아는 1년 반 이상 지속된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의 모라토리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일방적 제재만을 가할 뿐 러시아와 중국이 제시한 제재 완화 결의안 논의를 꺼리고 있다고 미국을 비난하면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재개를 이해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규탄하는 성명 채택을 논의했으나 중국과 함께 러시아가 이에 반대한 것은 이변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같은 북-러관계의 밀착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전역에서 군비경쟁, 경우에 따라서는 핵개발 경쟁의 압력을 전반적으로 고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은 크게 틀린 것 같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김정은의 핵의 유용성에 대한 확신은 강화되었을 것이며, 전쟁 과정을 지켜보면 자구적 무력의 확보 및 장거리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러 밀착과 동북아에서의 한-미-일 공조 체제의 강화는 북한에게 핵 및 그 투발 수단 고도화를 위한 기회인 동시에 역내 진영 간 대립 구도의 재건을 위한 적기라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북핵 문제에 대해 러시아는 핵확산 방지를 위한 NPT 체제 준수, 무력과 제재를 통한 대북 압박을 통한 한반도 긴장 조성 반대, 그리고 6자회담과 같은 다자 및 양자 대화를 통한 정치적·외교적 해법의 모색 등의 원칙을 견지해 왔다. 특히 러시아는 북핵 문제 관련 다자회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 과정을 동북아 다자안보 및 평화 체제 구축으로 발전시키면서 자국을 역내 정당한 이해당사자로 자리매김 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미-중 전략경쟁으로 동북아 지역 다자협력 구도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입지는 좁아지고 말았다.
러-북 간 경제협력도 새로운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신동방정책은 러시아의 미래 발전이 아시아와의 경제적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러시아로서는 아시아 방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지만, 중국 경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자신의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자율적인 전략 공간을 만드는 데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다른 동북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다양한 영향력의 채널을 구축하는 것이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런 판단하에 러시아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12년 아태경제협력회의(APEC)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한 이후 극동 개발을 위한 푸틴 대통령의 노력은 2015년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의 개최로 이어졌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극동에 대한 투자와 개발이 획기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일본의 경우 러시아와 북방영토 문제가 상존하는 한계가 있다. 한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러시아는 나진항 개발 및 물류 관련 남-북-러 사업을 추진하였지만, 북한의 핵 개발과 한-미 동맹으로 인한 남한의 소극성으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와 북한의 교역은 탈냉전기 들어 급감한 이후로 크게 회복되지 못하였다. 양국 관계 개선 전망이 강화되었던 2017년 기준 북-러 총무역액은 7,793만 달러로 1억 불에도 못 미치며, 북한 교역 총액의 1.3%에 수준이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은 취약한 양국 교역구조에 결정적 타격이 되었고, 2021년 러-북 교역 총액은 4만여 달러로 전년 대비 99.9% 감소했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북한의 국경봉쇄 조치와 대외무역 축소의 여파로 풀이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북한은 양국 간 교역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다. 특히 중국이 북한과의 교역 회복을 위한 조치에 나서면서 러시아와 북한 간의 교역 회복을 위한 노력도 본격화될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러 협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의 적극적 밀착 행보에 따라 기존 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 외교가 지속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지역 정치에 대한 러시아의 전략적 입장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중국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역내 영향력을 유지하기보다 자신의 독자적 영향력의 채널을 강화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설혹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의존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는 자신의 역내 독자적 영향력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노력은 남-북-러 3자협력 같은 적극적 형태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3자 협력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양자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러시아가 북한 자원을 개발하고 인프라를 개선하는 ‘승리(Pobeda) 프로젝트’의 재추진이나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양자화를 추진하려는 노력을 시도할 수 있다. 또한 대북 제재로 제한되었던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다양한 협력 사업이 활성화될 가능성도 크다. 노동력을 매개로 한 북-러 협력은 양국 간 실질 협력을 급속히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러-북 간 실질협력 강화에 대한 전망을 러-한 관계에 대한 부정적 효과에만 연관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러-북관계 강화를 한국과의 경제협력으로 연결해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의 노력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결국 한국 정부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선제적으로 악화시키거나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러시아로서는 전쟁 이후 제재로 인해 고립되는 상황에서 중국 이외의 아시아 파트너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유인을 강하게 느끼면서 한국과의 협력을 계속 모색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 대해 지정학적 중간국들이 이미 취하고 있는 실용적 입장과 조치들을 면밀히 연구하면서 한국은 제재 체제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실질 협력을 가능케 하는 협력의 우회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서방 기업이 철수한 러시아 시장이 한국에게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현지 기업들의 상황 보고는 전쟁 이후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의 행보에 비추어 볼 때 크게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실질 협력의 증진은 한국이 상실한 북한에 대한 영향력 통로를 회복·강화하는데 잘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다양한 기회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실질 협력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기대를 압도하는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러시아와 북한 사이의 군사적 협력이 어떻게 될 것이냐이다. 그동안 러시아는 한반도 전체에 아우르는 경제협력의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협력을 철저히 자제해 왔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한국 관련된 적대적 표현을 자제해 오던 푸틴 대통령이 작년 10월 말 발다이클럽 토론에서 북핵 문제 등에 답하면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기로 한 결정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러관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과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살상 무기의 공급 사실을 부인하고 이를 주권 문제라고 언급한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특히 지난 4월 말 미국 방문을 앞서 한국의 윤 대통령이 영국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민간인 대규모 공격, 대량학살, 중대한 전쟁법 위반 발생을 전제로 인도적 지원이나 재정 지원에 머물러 넘어 살상용 무기를 포함한 대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고려할 수 있다는 취지를 밝힘으로써 한국 정부의 입장 변화를 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동맹 및 서방과의 가치 동조 그리고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대한 포석 등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지만, 이는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러시아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바, 이러한 한국의 정책은 러시아의 대북 군사협력 재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러-북 군사협력 재개는 한국의 안보 구도를 한층 복잡한 상황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런 변화가 러-중 군사협력과 궤를 같이하면서 북-중-러 간 군사협력이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고양되면 한반도는 냉전 시기에 준하는 엄중한 안보적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0년대 후반 이후 들어 늘어가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군용기들이 동해 상공의 합동 초계비행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방공식별구역(ADIZ)을 무단으로 진입하는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국의 군용기들의 동해 방공식별구역 무단 진입은 한, 일 양국의 안보적 취약점에 대한 시험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런 중-러 공조는 지난 7월 중순 동해에서 행해진 양국 합동 군사훈련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분명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중-러 간 군사협력이 북한과의 협력으로 연결될 경우, 냉전 시기 동북아시아에서의 긴장의 기원이 되었던 한-미-일 대 북-중-러 간 대립 구도가 재연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북-러관계 밀착은 한반도 안보 구조에 다층적 도전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제공하거나 러시아에 명시적으로 적대적 행동을 취하면 러-북 간 군사협력이 재개의 빌미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북방삼각 대(對) 남방삼각 간의 분열·대립 구도가 구축됨으로써 탈냉전 이후 한국이 북방정책을 통해 일궈온 성과를 무위로 돌리게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상황은 역으로 한국이 러시아의 취약한 지점에 적대적 행위를 취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가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닫지 않고 종전 이후 다양한 실질 협력을 모색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한국의 국익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과 유연한 대응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보적 긴장을 우회하는 한국과 러시아 간의 실용적 협력의 가능성을 살려갈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4. 한국 외교에의 함의
신유라시아주의적 이념에 근거한 대유라시아 기획은 고전적 러시아제국 재건 노력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스피크먼(Nicholas Spykman)이나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에 의해 설파된 해양 지정학의 명제, 즉 유라시아 대륙에 패권국 내지 패권적 연대가 출현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는 원리에 정면 도전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국제질서 변동을 추구한다. 러시아가 공들여 발전시켜 온 중국과 인도 나아가 이란과 투르키예 등과의 대유라시아 연대가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넘어 다극화·다지역 질서를 가져올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변화하는 국제정세는 미국 중심의 ‘패권적 단극질서’의 유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여러모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질서의 변동을 추동하고 있으며 대립적 진영 간 경쟁 구도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국제정치를 단순히 양대 진영 간의 대립과 경쟁만으로 특징짓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나 사우디아라비아나 투르키예와같은 지정학적 중간국들의 실용적이고 유연한 대응은 미래 국제질서 변동 가능성에 대비하는 전략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미-중 전략경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 압력을 이겨내기 위한 전략적 대응은 중간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이런 지구정치 구도에서 유럽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은 여전히 유용한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동북아에서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균형 질서의 창출을 위한 주요한 행위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는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안보라는 두 목표를 위한 주요 협력상대국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맹방 일본은 여전히 러시아 가스의 최대 수입국 중 하나이며, 러시아 원유도 기준가 이상으로 수입하고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북극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러시아는 새로운 물류 혁명 시대의 피할 수 없는 협력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
격동하는 복합대전환의 시기에 한국은 중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도발은 탈냉전기 어떤 시기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도전이다. 해양 세력과의 연대를 통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발전 및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성공 신화는 이제 분열 및 재구조화 와중에 있는 세계정치의 충격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해야 한다. 반도 국가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해륙복합국가의 정체성을 발현해 가려 한다면 한국이 대륙의 변화와 절연된 진로에만 몰두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는 한국의 지정학/지경학적 위치성은 너무 양가적이다. 따라서 한국은 기존 한국의 발전의 동력이 되어 온 해양적 발전 벡터와 더불어 한 세기 만에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대륙적 발전 벡터를 아우르는 복합 전환의 대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더불어 유라시아 림랜드(Rimland)에서 한국과 유사한 지정학적 중간국의 딜레마를 겪고 있는 많은 ‘유사입장국들’(like-positioned countries)과의 중간국 연대를 다면적으로 강화하여 전략적 자율성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찾고 확대해 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중 전략경쟁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의 딜레마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은 격동의 시간을 맞아 적절한 외교적 균형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은 한국 외교의 근간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미국과 서방이 추구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가치 동맹을 확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가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과의 교류를 제한하는 형태로 가지 않도록 다층적·다면적 외교의 통로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 정부가 지난 정부에서 노정된 한계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취하게 된 한국 외교의 ‘전략적 선명성’은 이 시기 한국의 중요한 지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략적 선명성이 ‘전략적 유연성’(≠전략적 모호성)과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선명하게 취할 입장과 유연하게 관리할 입장을 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따라서 양자택일적 사고에서 벗어나, 환경 조건과 기회 그리고 자기 능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반한 적정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전략적 선명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속성과 예측가능성이다. 따라서 한국에게 적절한 균형점을 설정하고 이를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유연하고 실용적인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국에게 적절한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NEAR Policy Brief Series 는 국제 사회 내에서 수 없이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정책 이슈를 다룹니다. 핵심 정책 현안을 선정하여 그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분석과 정책 제언을 듣고자합니다.격류를 타고 가는 시대 흐름을 올바로 적시에 파악하는데 다소마나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발행 일시 : 2023년 7월
발행 기관 : NEAR 재단
집필 제목 : 우크라이나 전쟁 500일의 전황과 전망 그리고 한반도
집필 정보 : 신범식(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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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500일의 전황과 전망 그리고 한반도
신범식(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난 7월 8일로 500일을 넘겼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세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가 주로 공세의 입장이었다면, 지난 6월 초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러시아가 수세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공수가 뒤바뀌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지난 7월 초순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NATO) 정상회담에서 나토 가입을 확약받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대반격’을 이어가며 실지 회복을 위한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1.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개와 현황
지난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러시아는 동부 돈바스, 남부 크림, 그리고 북부 벨라루시 방면에서 전면적 공격을 개시하였다가 키예프 함락을 포기하였고, 이후 러시아군은 돈바스 지역에 집중하면서 이 지역과 크림반도를 연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난공불락의 도시 요새라 불렸던 마리우풀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러시아 본토로부터 점령지를 통한 크림반도 연결을 달성했다. 이후 전황은 길고 지리한 소모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늦은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우크라이나가 루간스크 방면의 일부 점령지를 탈환하자 러시아는 10월 말 ‘부분 동원령’을 통해 징집병 30만을 포함해 총 45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충하면서 우크라이나의 공세에 대응하는 한편, 동부 점령 4개주에 대한 영토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돈바스 지역의 주요 거점인 바흐무트 전투를 통해 우크라이나군 병력을 소진시키는 소모전을 지속하였다. 개전 초 이후 지지부진하던 종전 중재 노력이 지난 2월 전쟁 1주년이 지나면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영토 탈환을 위해 더 큰 공격력을 확보하기 위해 서방측에 대대적 무기지원을 요청하였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은 완편 기갑부대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미국의 에이브람스 계열 전차와 독일의 레오파드-II 전차 그리고 장갑차를 비롯한 각종 전술차량 및 야포들을 다량 지원하였다. 결정적인 공군력 열세의 보강을 위해 필요한 F-16을 비롯해 중장거리 미사일 등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지원 요청에 대해 서방측은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향후 전황에 따라서는 이에 대한 지원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5월에 길고 소모적인 전투로 기억되는 바흐무트 전투를 끝으로 러시아의 공세는 마무리되었고, 이 소모전 시기를 활용해 러시아는 새롭게 형성된 긴 전선에 걸쳐 3중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한편 지난 6월 초 카홉스카야 댐의 폭발 사고가 있었는데, 이로써 드네프르 강 하류에 홍수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양측은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댐의 붕괴는 새로는 전투의 서막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댐의 붕괴로 헤르손 지역에서의 군사 작전이 어려워진 상황은 러시아가 오데사 방면으로 확전할 가능성을 줄여주는 한편,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헤르손 방면에서 진행되기도 어렵게 만듦으로써 새롭게 시작되는 우크라이나의 반격과 러시아의 수비는 자포리자와 도네츠크 지역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6월 4일 이후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의 1차 공세는 예상대로 자포리자와 도네츠크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후 한 달여간 계속된 우크라이나의 공세는 큰 성과가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탐색전과도 같은 1차 공세 이후에도 그동안 절치부심 “대반격”을 준비했던 우크라이나는 7월말 2차 공세를 시작하면서 러시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치열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한편 최근 러시아의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일으킨 무장 반란은 러시아 군부 내지 최고지도자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며 러시아 전쟁 수행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서방 및 우크라이나 측의 큰 기대를 모으며 세계가 예의 주시하였지만, 바그너그룹이 돈강로스토프(Rostov on Don)에 위치한 러시아 남부사령부를 장악한 뒤 모스크바로 진격했던 이 사태는 36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후 바그너그룹의 역할조정과 벨라루시에서의 새로운 활동 등이 확인되면서 프리고진을 둘러싼 많은 추측과 그 여파에 대한 논란은 점차 잦아들었다. 이 사건 직후 미국의 전쟁연구소(ISW))가 전망한 바와 같이 이 사태의 전쟁에 대한 직접적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이 노출한 러시아 군 지도부의 취약성과 푸틴 리더십에 대한 부정적 영향에 대한 관찰은 지속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망
전쟁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일단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가 관건이다. 전쟁은 전장(戰場)에서 수행되지만, 전쟁의 마무리는 협상테이블에서 이루어진다. 종전을 위한 협상 조건은 전장에서의 성과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첫째 시나리오는 종전을 위한 협상 단계로의 전환 가능성과 관련된다. 우크라이나가 향후 서너 차례의 공세를 통해 러시아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한다면, 서방 입장에서 이 전쟁을 더 길게 끌고 가기에는 한계점에 봉착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 쌓여온 전쟁 피로감에 더해 전쟁 지원을 지속하며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유럽 국가들 내부의 불만과 이견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내년 봄에, 미국도 내년 11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한다. 전쟁을 더 끌고 가는 것이 선거에 미칠 영향이 불확실하므로, 정치가들에게는 전쟁의 영향을 관리해 그 예측가능성이라도 높이려는 최소한의 시도라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 5월 19일부터 열렸던 히로시마 G7 정상회담에서 감지되었다. 서방 선진국들은 이 전쟁의 마무리와 관련하여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으나 대신 유럽연합(EU)에는 가입하면서 전후 대규모 재건사업을 제공받는 방식의 종전 협상을 추진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방의 추진 의지에 따라서는 우크라이나가 이 타협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의 의지는 여전히 높지만, 서방의 지원이 줄어들면 우크라이나가 전면전을 단독으로 지속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전쟁 지속의 의지가 전쟁 지속의 조건이 되는 현 상황에서 서방의 우크라이나전에 대한 입장 변화가 종전의 핵심적 조건이 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상황이 만만치 않다. 1년 반 가까운 전쟁을 수행하면서 러시아는 서방측의 대대적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지만, 러시아 경제가 얼마나 더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지난 5월 17일 러시아 통계청(Rosstat)은 2023년도 1/4분기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이 –1.9%로 발표했다. 2023년도 1/4분기 러시아의 석유 수출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최대 수준이었지만, 석유 수출을 통한 러시아의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43% 감소했다. 예상보다 제재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주장도 있으며, 수출보다 내수가 늘어나면서 그 충격을 상쇄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문제는 재정 적자이다. 전년 동기 대비 2023년 1~4월 러시아 연방정부의 수입은 22% 감소한 7조 8,000억 루블(한화 약 135조 3,980억 원)을 기록했으며, 지출은 26% 늘어난 11조 2,000억 루블(한화 약 194조 4,170억 원)을 기록했다(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보고서, 2023년 4월). 특히 차년도 예산을 끌어와 지출하는 방식의 회계가 얼마나 더 가능할지 불확실하다. 러시아의 자원의 판로가 다변화되면서 대러시아 경제 제재의 효과가 반감된 것은 분명하지만, 러시아 경제적 취약성은 여전히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의 약점으로 주목된다.
우크라이나의 소위 “대반격”이 시작된 이후 전쟁과 관련된 푸틴 대통령의 일련의 인터뷰나 연설에서 서방의 지원에 힘입은 우크라이나의 반격은 무위로 끝나고 있으며 서방의 무기고는 곧 고갈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일부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확전보다는 종전에 대한 선호가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러시아로서도 전쟁 점령지를 영토화하고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막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차선의 선택지일 수 있다.
물론 점령지로부터의 퇴각이라는 선택지는 러시아 지도부의 염두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전쟁을 지속하거나 확전을 기획하기에는 러시아가 아슬아슬하게 유지해 가고 있는 국내 정치적 및 경제적 균형이 상당히 취약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영토 탈환의 견지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서방과 러시아가 암묵적으로 종전을 위한 구도를 우크라이나에게 요구하게 될 것이다. 서방은 우크라이나에게 EU 가입과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대대적 원조를 제안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빠르면 이번 가을부터 연말 사이에 이 협상 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서방의 종전을 향한 압력에 반대하며 우크라이나가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하는 저강도의 대러시아 저항 전쟁을 장기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둘째 시나리오는 확전과 불안정성의 확대·지속 시나리오다. 이번 여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서너 차례에 걸친 우크라이나의 공세가 큰 전과를 거두면서 우크라이나가 현 러시아 점령지 내에 상당한 반격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 우크라이나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공격형 무기를 서방측에 요청할 것이다. 서방측은 자유주의 진영 연대(連帶)의 관점에서라도 이런 우크라이나의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전쟁의 지속을 넘어 확전의 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러시아가 부분적으로 퇴각하게 될 경우 러시아가 다시 타협적 입장에서 종전을 모색할 것인지(이는 러시아의 명백한 패전으로 인식될 것이다!) 아니면 추가로 동원령을 내리고 오데사와 하리코프 등지에 대한 공세를 통해 영토의 추가적 획득을 시도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
추가 동원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러시아가 과연 얼마나 여력이 있을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한 점은 추가적 동원을 단행하게 되면 그것은 푸틴 정권이 명운을 걸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지도부는 확전에 따른 부담을 상쇄하기 위해 핵을 포함한 전략무기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유혹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최근 메드베데프 전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의한 크림 탈환 시도나 자포로제 차단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전략무기 사용 가능성을 거론한 것은 바로 이런 러시아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시나리오 중 어떤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의 공세가 영토 회복이라는 가시적인 결실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서방에서는 사정거리가 단축·조정된 스톰쉐도우(Storm Shadow)의 공급을 필두로 향후 타우러스(TAURUS)나 어태큼스(ATACMS)와 같은 중장거리 미사일 및 F-16 전투기의 공급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서방은 타협적 구도보다 우크라이나의 지원을 통해 러시아를 더 약화시키는 전략을 유지하는 방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반격은 이번 전쟁의 향방을 가를 중대한 국면이 될 것이다. 세계 주요국들은 한편으로는 전쟁의 종전을 위한 중재의 가능성과 모멘텀은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의 반격 성과에 따른 전쟁 지속의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유동적 구도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3. 우크라이나 전쟁과 한반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을 살펴보는데 가장 주목할 지점은 역시 러-북관계의 밀착과 한-미-일 공조체제의 강화라고 할 것이다. 지난 7월말 러시아의 쇼이구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전승절 기념해사 참석차 방문한 것은 러시아와 북한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내외의 우려를 낳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줄곧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 패권의 오만이 전쟁의 배경이 깔려 있으며 전쟁의 원인을 일방적 나토(NATO)의 확장에서 러시아가 느낀 위협이라 논평하였다. 북한은 유엔(UN)의 러시아 전쟁 규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5개국 중 하나였으며,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러시아를 축출하는 결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던졌다. 이런 북한의 대응에 호응이라도 하듯 러시아는 1년 반 이상 지속된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의 모라토리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일방적 제재만을 가할 뿐 러시아와 중국이 제시한 제재 완화 결의안 논의를 꺼리고 있다고 미국을 비난하면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재개를 이해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규탄하는 성명 채택을 논의했으나 중국과 함께 러시아가 이에 반대한 것은 이변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같은 북-러관계의 밀착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전역에서 군비경쟁, 경우에 따라서는 핵개발 경쟁의 압력을 전반적으로 고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은 크게 틀린 것 같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김정은의 핵의 유용성에 대한 확신은 강화되었을 것이며, 전쟁 과정을 지켜보면 자구적 무력의 확보 및 장거리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러 밀착과 동북아에서의 한-미-일 공조 체제의 강화는 북한에게 핵 및 그 투발 수단 고도화를 위한 기회인 동시에 역내 진영 간 대립 구도의 재건을 위한 적기라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북핵 문제에 대해 러시아는 핵확산 방지를 위한 NPT 체제 준수, 무력과 제재를 통한 대북 압박을 통한 한반도 긴장 조성 반대, 그리고 6자회담과 같은 다자 및 양자 대화를 통한 정치적·외교적 해법의 모색 등의 원칙을 견지해 왔다. 특히 러시아는 북핵 문제 관련 다자회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 과정을 동북아 다자안보 및 평화 체제 구축으로 발전시키면서 자국을 역내 정당한 이해당사자로 자리매김 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미-중 전략경쟁으로 동북아 지역 다자협력 구도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입지는 좁아지고 말았다.
러-북 간 경제협력도 새로운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신동방정책은 러시아의 미래 발전이 아시아와의 경제적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러시아로서는 아시아 방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지만, 중국 경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자신의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자율적인 전략 공간을 만드는 데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다른 동북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다양한 영향력의 채널을 구축하는 것이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런 판단하에 러시아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12년 아태경제협력회의(APEC)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한 이후 극동 개발을 위한 푸틴 대통령의 노력은 2015년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의 개최로 이어졌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극동에 대한 투자와 개발이 획기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일본의 경우 러시아와 북방영토 문제가 상존하는 한계가 있다. 한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러시아는 나진항 개발 및 물류 관련 남-북-러 사업을 추진하였지만, 북한의 핵 개발과 한-미 동맹으로 인한 남한의 소극성으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와 북한의 교역은 탈냉전기 들어 급감한 이후로 크게 회복되지 못하였다. 양국 관계 개선 전망이 강화되었던 2017년 기준 북-러 총무역액은 7,793만 달러로 1억 불에도 못 미치며, 북한 교역 총액의 1.3%에 수준이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은 취약한 양국 교역구조에 결정적 타격이 되었고, 2021년 러-북 교역 총액은 4만여 달러로 전년 대비 99.9% 감소했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북한의 국경봉쇄 조치와 대외무역 축소의 여파로 풀이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북한은 양국 간 교역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다. 특히 중국이 북한과의 교역 회복을 위한 조치에 나서면서 러시아와 북한 간의 교역 회복을 위한 노력도 본격화될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러 협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의 적극적 밀착 행보에 따라 기존 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 외교가 지속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지역 정치에 대한 러시아의 전략적 입장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중국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역내 영향력을 유지하기보다 자신의 독자적 영향력의 채널을 강화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설혹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의존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는 자신의 역내 독자적 영향력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노력은 남-북-러 3자협력 같은 적극적 형태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3자 협력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양자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러시아가 북한 자원을 개발하고 인프라를 개선하는 ‘승리(Pobeda) 프로젝트’의 재추진이나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양자화를 추진하려는 노력을 시도할 수 있다. 또한 대북 제재로 제한되었던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다양한 협력 사업이 활성화될 가능성도 크다. 노동력을 매개로 한 북-러 협력은 양국 간 실질 협력을 급속히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러-북 간 실질협력 강화에 대한 전망을 러-한 관계에 대한 부정적 효과에만 연관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러-북관계 강화를 한국과의 경제협력으로 연결해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의 노력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결국 한국 정부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선제적으로 악화시키거나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러시아로서는 전쟁 이후 제재로 인해 고립되는 상황에서 중국 이외의 아시아 파트너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유인을 강하게 느끼면서 한국과의 협력을 계속 모색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 대해 지정학적 중간국들이 이미 취하고 있는 실용적 입장과 조치들을 면밀히 연구하면서 한국은 제재 체제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실질 협력을 가능케 하는 협력의 우회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서방 기업이 철수한 러시아 시장이 한국에게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현지 기업들의 상황 보고는 전쟁 이후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의 행보에 비추어 볼 때 크게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실질 협력의 증진은 한국이 상실한 북한에 대한 영향력 통로를 회복·강화하는데 잘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다양한 기회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실질 협력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기대를 압도하는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러시아와 북한 사이의 군사적 협력이 어떻게 될 것이냐이다. 그동안 러시아는 한반도 전체에 아우르는 경제협력의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협력을 철저히 자제해 왔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한국 관련된 적대적 표현을 자제해 오던 푸틴 대통령이 작년 10월 말 발다이클럽 토론에서 북핵 문제 등에 답하면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기로 한 결정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러관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과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살상 무기의 공급 사실을 부인하고 이를 주권 문제라고 언급한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특히 지난 4월 말 미국 방문을 앞서 한국의 윤 대통령이 영국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민간인 대규모 공격, 대량학살, 중대한 전쟁법 위반 발생을 전제로 인도적 지원이나 재정 지원에 머물러 넘어 살상용 무기를 포함한 대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고려할 수 있다는 취지를 밝힘으로써 한국 정부의 입장 변화를 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동맹 및 서방과의 가치 동조 그리고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대한 포석 등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지만, 이는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러시아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바, 이러한 한국의 정책은 러시아의 대북 군사협력 재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러-북 군사협력 재개는 한국의 안보 구도를 한층 복잡한 상황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런 변화가 러-중 군사협력과 궤를 같이하면서 북-중-러 간 군사협력이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고양되면 한반도는 냉전 시기에 준하는 엄중한 안보적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0년대 후반 이후 들어 늘어가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군용기들이 동해 상공의 합동 초계비행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방공식별구역(ADIZ)을 무단으로 진입하는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국의 군용기들의 동해 방공식별구역 무단 진입은 한, 일 양국의 안보적 취약점에 대한 시험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런 중-러 공조는 지난 7월 중순 동해에서 행해진 양국 합동 군사훈련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분명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중-러 간 군사협력이 북한과의 협력으로 연결될 경우, 냉전 시기 동북아시아에서의 긴장의 기원이 되었던 한-미-일 대 북-중-러 간 대립 구도가 재연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북-러관계 밀착은 한반도 안보 구조에 다층적 도전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제공하거나 러시아에 명시적으로 적대적 행동을 취하면 러-북 간 군사협력이 재개의 빌미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북방삼각 대(對) 남방삼각 간의 분열·대립 구도가 구축됨으로써 탈냉전 이후 한국이 북방정책을 통해 일궈온 성과를 무위로 돌리게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상황은 역으로 한국이 러시아의 취약한 지점에 적대적 행위를 취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가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닫지 않고 종전 이후 다양한 실질 협력을 모색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한국의 국익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과 유연한 대응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보적 긴장을 우회하는 한국과 러시아 간의 실용적 협력의 가능성을 살려갈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4. 한국 외교에의 함의
신유라시아주의적 이념에 근거한 대유라시아 기획은 고전적 러시아제국 재건 노력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스피크먼(Nicholas Spykman)이나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에 의해 설파된 해양 지정학의 명제, 즉 유라시아 대륙에 패권국 내지 패권적 연대가 출현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는 원리에 정면 도전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국제질서 변동을 추구한다. 러시아가 공들여 발전시켜 온 중국과 인도 나아가 이란과 투르키예 등과의 대유라시아 연대가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넘어 다극화·다지역 질서를 가져올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변화하는 국제정세는 미국 중심의 ‘패권적 단극질서’의 유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여러모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질서의 변동을 추동하고 있으며 대립적 진영 간 경쟁 구도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국제정치를 단순히 양대 진영 간의 대립과 경쟁만으로 특징짓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나 사우디아라비아나 투르키예와같은 지정학적 중간국들의 실용적이고 유연한 대응은 미래 국제질서 변동 가능성에 대비하는 전략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미-중 전략경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 압력을 이겨내기 위한 전략적 대응은 중간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이런 지구정치 구도에서 유럽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은 여전히 유용한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동북아에서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균형 질서의 창출을 위한 주요한 행위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는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안보라는 두 목표를 위한 주요 협력상대국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맹방 일본은 여전히 러시아 가스의 최대 수입국 중 하나이며, 러시아 원유도 기준가 이상으로 수입하고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북극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러시아는 새로운 물류 혁명 시대의 피할 수 없는 협력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
격동하는 복합대전환의 시기에 한국은 중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도발은 탈냉전기 어떤 시기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도전이다. 해양 세력과의 연대를 통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발전 및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성공 신화는 이제 분열 및 재구조화 와중에 있는 세계정치의 충격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해야 한다. 반도 국가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해륙복합국가의 정체성을 발현해 가려 한다면 한국이 대륙의 변화와 절연된 진로에만 몰두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는 한국의 지정학/지경학적 위치성은 너무 양가적이다. 따라서 한국은 기존 한국의 발전의 동력이 되어 온 해양적 발전 벡터와 더불어 한 세기 만에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대륙적 발전 벡터를 아우르는 복합 전환의 대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더불어 유라시아 림랜드(Rimland)에서 한국과 유사한 지정학적 중간국의 딜레마를 겪고 있는 많은 ‘유사입장국들’(like-positioned countries)과의 중간국 연대를 다면적으로 강화하여 전략적 자율성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찾고 확대해 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중 전략경쟁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의 딜레마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은 격동의 시간을 맞아 적절한 외교적 균형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은 한국 외교의 근간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미국과 서방이 추구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가치 동맹을 확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가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과의 교류를 제한하는 형태로 가지 않도록 다층적·다면적 외교의 통로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 정부가 지난 정부에서 노정된 한계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취하게 된 한국 외교의 ‘전략적 선명성’은 이 시기 한국의 중요한 지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략적 선명성이 ‘전략적 유연성’(≠전략적 모호성)과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선명하게 취할 입장과 유연하게 관리할 입장을 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따라서 양자택일적 사고에서 벗어나, 환경 조건과 기회 그리고 자기 능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반한 적정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전략적 선명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속성과 예측가능성이다. 따라서 한국에게 적절한 균형점을 설정하고 이를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유연하고 실용적인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국에게 적절한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